<식욕부진증-미뉴친 체계이론>
체계이론의 발달과 더불어 미뉴친의 이론은 가족을 움직임이 있는 하나의 체계로 생각해 가족 내부에서 생기는 역동을 대인관계적인 측면에서 고려하였다. 그는 체계이론에 근거한 계획된 가족 사정을 통해 가족에 내재한 병리를 명확히 파악한 후 치료적 개입을 해 나갔다. 미뉴친은 상담과정에서 내담자가 호소하는 신체적 증상을 나타내는 가족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런 가족의 특징을 아래와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1) 융합
첫 번째 특징은 융합이다. 즉 신경성 식욕부진증의 가족은 망처럼 서로 강하게 연결되어서 개인 또는 두 사람 간의 변화라는 하위체계의 움직임이 전체 가족체계에 곧바로 영향을 준다. 물론 이것은 정상적인 가정에서도 보는 가족의 특징이나, 정상적인 가정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부부, 부모 자녀, 형제라는 가족 전체의 체계를 구성하는 하위 체계가 잘 분화해 기능하며 그 하위 체계 간의 경계도 명확하다. 그리고 자녀는 그 하위 체계에서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를 배우게 된다. 예를 들어, 부부 하위 체계는 부모만으로 구성되었지만, 자녀는 그것을 통해 친밀한 인간관계나 남녀관계를 배우게 된다. 부모 자녀의 하위 체계에서는 힘의 관계를 경험하면서, 윗사람과 다양한 관계 방식을 배우게 된다. 즉, 자신이 원하는 것 어떻게 전하는가, 상대방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행동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등을 직접 경험하면서 권위라는 개념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가는 것이다. 또한 형제 하위 체계에서 자녀들은 처음으로 같은 세대의 또래집단을 형성하여 거기서 서로가 어떻게 협력하며 또는 경쟁하는가를 배우며, 앞으로 전개될 다양한 또래집단에 들어가 위한 기초를 마련한다.
그런데 신경성 식욕부진증 가족의 경우에는 하위체계 내부의 경계나 하위 체계 간의 경계가 미분화되어 명확하지 않다. 예를 들어, 가족이 서로 상대의 사생활을 침범하거나 부모 자녀관계에만 열중한 나머지 배우자와의 관계가 불안정하게 어느 한쪽의 부모만이 힘을 가졌거나 자녀가 부모의 입장에 서 있는 경우도 있다. 또한 부모와 조부모의 관계가 지나치게 밀착되어서 부부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더욱이 이러한 상황에서는 독립된 자기가 경시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자녀는 안정된 가족관계 속에서 획득 가능한 자아정체감 형성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러한 환경에서의 자녀는 스스로를 신뢰하면서 행동하지 못한 채 자신을 억누르면서까지 상대의 반응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게 된다.
(2) 과보호
과보호란 가족이 각 개인의 행복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는 데서 비롯된다. 여기서 의미하는 관심이란 기본적 의식주나 질병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때로는 부모의 지나친 관심이 청소년에게 자신의 능력이나 자율성, 흥미라는 것을 가정 이외에서 자유롭게 발휘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자녀 스스로도 가족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이 점차 강해진다. 어떤 청소년은 가족이 자신의 증상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그들에게 인정받는 것과 동일하다고 판단해 스스로가 증상에 더욱 고착하는 경우도 있다.
(3) 경직
경직(rigidity)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정상적인 가족의 경우는 이직, 이사, 친인척의 죽음이라는 여러 가지 변화가 생기면 그것에 대응하도록 체계를 변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으로서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가족은 소속감을 잃지 않는다. 예를 들어, 자녀의 성장은 가족에게 많은 변화를 요구한다. 대부분의 가족은 자녀가 연령에 맞는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가족 규범이나 관계 패턴을 변화시킬 것이다. 초기 부모 자녀 간의 경계는 미분화되었지만 자녀의 성장과 함께 점차 경계를 분화시켜서 자녀가 자율성을 발휘하도록 돕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신경성 식욕부진증의 가족은 친숙한 자신들의 상호교류 패턴에 지나치게 고착한 나머지 변화를 초래하는 사건에 대해서 허약해지거나 때로는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부인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4) 갈등해결 능력의 결여
앞에서 언급한 3가지 특징으로 미루어 신경성 식욕부진증 가족은 서로 의견을 달리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겉으로 보이는 조화를 유지하려는데 급급한 경향이 있다. 즉, 갈등 해결을 통한 안정이 아니라, 갈등을 회피함으로 체계의 안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미뉴친은 이것을 갈등 해결 능력의 결여로 보았다. 물론 정상적인 가족의 경우에 그 같은 경향을 보이나 그들은 궁극적으로 어떤 형태로든 갈등에 직면해 해결하려는 노력을 한다.
(5) 스스로 휘말리는 자녀
미뉴친은 신경성 식욕부진증의 증상을 보이는 청소년 자신이 가족체계의 갈등 속에 스스로 휘말리는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신경성 식욕부진증 환자 부모는 많은 경우 갈등적인 부부관계에 처해 있다. 그런데 이들은 자녀를 포함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자신들의 갈등을 회피하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어, 자신에게 유리한 형태로 자녀
를 이용해 배우자와 대립하거나 밀접한 부모 자녀관계를 만들어 자녀가 보이는 문제행동이나 증상만을 부부간 대화의 주제로 삼아 자신들의 문제는 보지 않으려고 한다. 한편 그 같은 갈등상황에 휘말린 자녀들은 스스로 긴장한 상황을 완화해 보려는 다양한 노력을 하게 된다. 이때 자녀들이 노력의 일환으로 자신들의 증상을 이용한다면 증상은 강화되거나 지속되는 것뿐 아니라 병적인 가족 상황도 지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셈이다.